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김영사,2017) p.400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김영사,2017) p.400

의미의 그물망

보통 우리는 어떤 유형의 실재에 대해, ‘중력’이라는 객관적인 실재와 ‘믿음’과 ‘느낌’과 같은 주관적인 실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이분법은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에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객관적인 것으로 여기게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신·돈·국가·인문주의’ 같은 주관적인 판단으로 여길 수 없는 것에 대해 객관적 실재로 여긴다.

하지만 실재에는 제3의 실재가 존재하는데, 바로 상호주관적인 실재이다. 상호주관적인 실재는 객관적이지도 않으면서 주관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의사소통과 믿음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돈은 그 자체로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가치를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치 있다는 사실을 수많은 사람이 부지불식간에 인정하면서 실질적인 힘의 주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이버 공간의 가상화폐는 어떤가? 역시 그 자체에는 가치가 없다. 사람들이 가상화폐가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을 때부터 가치가 생겨난 것이다. 돈이 상호주관적 실재임은 의미 부여의 측면에서 보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현재 우리가 제삼자의 입장으로 볼 수 있는 가치들, 가령 다신교의 신, 나치즘, 외래문화 같은 것들도 역시 그렇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삶에 직접 맞닿아 있는 우리 신·우리나라·우리의 가치가 허구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생이 객관적인 의미를 지니길 원하고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은 그들이 서로에게 말하는 이야기의 그물망 안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십자군 전쟁을 아는가? 수많은 이들이 이교도들에게 빼앗긴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자 결정이지만, 당시에는 유럽 기독교 세계관에 사는 개개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들에게는 이것은 의미 없는 희생이 아닌 천국으로 가는 영광스러운 행동이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유럽인이 난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중동으로 떠나겠다고 결심하면 많은 이들이 그의 결정을 존중하고 대단함을 인정할 것이다. 이렇듯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느냐 어느 나라의 살고 있느냐 어느 가정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그물망이 형성되고 그 그물망에 영향 받는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천국으로 가는 대가로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역시 나치즘도 미친 짓으로 여겨진다. 불과 50년 전의 공산주의 낙원에 대한 믿음 때문에 수천만 명을 희생시킨 공산주의는 어떤가? (특히 현재의 우리나라에서의 공산주의는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현재 의미의 그물망은 무엇인가? 또, 의미의 그물망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의미의 그물망은 대규모 집단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준 유일한 방법이다. 사피엔스 외에 다른 동물들이 세계의 지배자가 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보통 알게 모르게 동물들을 사피엔스 보다 한 단계 낮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들을 실험하고 사육하고 사냥하고 보호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의지에 달린 듯하다. 사피엔스와 다른 동물들은 무엇인가 질적인 차이가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사실 동물들은 사피엔스와 같은 지적인 생명체로서의 연구 결과가 차고 넘친다. (그래서 실험에 동원되기도 한다) 그들은 생각할 수 있고 전략을 짤 수 있고 모성애도 느낄 수 있으며 그들 나름대로 언어도 있다. 그리고 연대 할 수 있다. 물론, 동물이 하는 연대는 소수 집단에서만 유효하며 이 소규모 집단은 1만 2000년 전의 수렵·채집 사회 안에서의 사피엔스에게도 유효했다. 이후, 사피엔스는 어떤 계기를 통해 동물과 달리 농경과 목축을 시작했고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에 따라, 잉여 생산물, 지배자 그리고 엘리트가 등장했다. 또 배·바퀴와 같은 새로운 수송기술이 등장하면서 물류와 유통의 인프라가 갖춰져 도시와 왕국과 같은 대규모 집단이 등장했다. 대규모의 집단으로의 전환을 통해 수렵·채집 사회와는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이 질적인 변환은 인류가 수백만 년 동안 소규모 집단으로 살아왔다는 사실과 대규모 집단으로까지 불과 몇 천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사피엔스들에게 있어서 혼란은 명백했다. 다시 말해, 진화론적으로 사피엔스는 대규모 협력 본능이 진화하기에는 시간이 매우 짧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토지와 물을 나눌지, 불화와 분쟁을 조정할지, 가뭄이나 전쟁에서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합의가 있었을까? 이것을 해결하고 가지 않은 이상 집단의 유지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규모 집단의 유지가 가능했던 이유는 의미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져 있는 공통의 신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통의 신화는 대규모 인구를 관리할 사회적 규범을 만들었다. 이것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도록 해 충분한 식량 수확과 이를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여 더 많은 부와 더 나은 안정을 얻을 수 있도록 약속하고 있다. 일례로 메소포타미아의 함무라비 법전에는 신으로부터 정의와 권리를 대신하는 함무라비왕의 엄격한 위계질서가 작성되어 있는데,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매우 부자연스럽지만 각자 맡은 바의 역할을 규정함으로써 사회적 규범으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엄격한 위계질서가 사회적 합의와 국가 운영에 효율적인 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되었다. 서양 중세 사회, 동아시아 역사 속의 성리학적 질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 흑인 노예제도는 엄격한 위계질서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꽤 오래 유지 되었다.

하지만, 위와 같이 과거의 의미의 그물망은 꽤나 가혹한 사회적 질서인 듯하다. 혹시 대규모 집단을 유지하는 방법에 있어서 의미의 그물망을 두르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일까? 물론, 자연계의 개미 집단이나 꿀벌 집단은 대규모 사회임에도 안정되어 있고 회복성이 있다. 왜냐하면 개미와 꿀벌의 대규모 집단은 사회적 규범들이 DNA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적으로 이야기의 그물망을 가진 셈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DNA에 위계질서라는 것은 새겨져 있지 않다. 사실상 허구인 위계질서는 그 자체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법과 관습, 절차와 예절 등과 같은 인간 삶의 규칙에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들로 강화된다. 그리고 법과 관습, 절차와 예절은 뇌의 용량과 불안정한 기억이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쓰기’가 발명되면서 더 오래 유지 되었다. 쓰기는 유형의 기호를 통해 정보를 저장하는 방법이다. 쓰기에 사용된 유형의 기호는 문자와 숫자였다. 문자나 숫자는 세금 지불액과 빚의 액수, 소유권을 기록한 문서들, 시, 역사책 그리고 법률책을 작성하는데 사용되었고 대규모 집단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문자와 숫자를 사용하는 쓰기와 상상의 질서는 의미의 그물망을 형성해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했던 대규모 집단의 효율적 운용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역사적으로 대규모 집단의 복잡한 인간사회는 상상의 질서를 통해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양분되었다. 여기서, 지금의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듯하다. “위계질서는 지배자들과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역사상 가장 큰 사기야”라고 말이다.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을 연민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들의 삶이 정해지고 죽을 때까지 특정한 삶에 얽매여 있다. 농부들은 평생 농사를 하면서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급급했다. 그보다 높은 계급의 지배자들은 그들이 생산한 식량을 빼앗아 정치를 하고 전쟁을 지위하고 예술과 철학을 했다. 역사의 기록된 모든 것들은 피지배자들의 피와 땀 위에서 자라났다.

의미의 그물망 해체와 오늘날의 의미의 그물망 인본주의

우리는 과거의 위계질서가 허구라는 ‘사실 판단’을 통해서 과거 지배자·엘리트들이 누린 특권들이 거짓에 기반 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들이 부당하다고 부도덕하다고 ‘윤리적 판단’을 내린다. 이렇듯 우리는 ‘사실 판단’과 ‘윤리적 판단’의 상호작용 통해 행동하거나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실 판단과 윤리적 판단의 근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과거에는 사실 판단과 윤리적 판단이 모두 종교에서부터 나왔다. 윤리적 판단과 사실 판단의 정당성은 당시 특정 종교가 내세우는 논리와 가치체계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그리고 대규모 집단 속에 인간의 행위가 사실 판단과 윤리적 판단을 통해 어떤 실질적 지침이라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면, 이 세 가지 중 하나가 어떤 계기로 인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수정·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과학적 사고방식이라는 새로운 지식 축적 방법은 수많은 구시대적인 가치들에 반기를 들었다. 과학적 사고방식은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실험과 관찰을 토대로 직접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진화론과 창조론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신이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 창조해 냈다.”라는 기독교의 창조론은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사실적 판단을 제시하고 신이 만든 인간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윤리적 판단으로 나아가게 한다. 반면,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진화론은 고고학적 증거들과 각종 실험을 통해 지금의 인간이라는 존재는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의 조상인 ‘루시’를 기점으로 진화되어 영장류 과(科) 호모 속(屬) 사피엔스 종(種)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도, 사실이 그렇다고 해서 진화론은 인간 생명의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없다. 사피엔스의 조상이 유인원이라는 증거가 속속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면, “인간의 가치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진화론은 침묵한다. 또는 “호모 사피엔스 그 다음 진화도 있는 것인가?” 진화론은 진화의 여부에 대해 대답할 수는 있으나 그 진화가 유익한 것이거나 진화를 위해서 무엇인가 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과학은 어떠한 사실을 관찰과 실험을 토대로 수학적으로 표현해 내는데, 그것은 어떤 사실들만 표현할 뿐 가치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적 지식은 항상 반증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 언제든지 반증 될 준비가 되어있다. 이 불완전하고 역동적이고 유연한 특성 때문에 우리는 과학적 지식으로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없다.

윤리적 판단은 종교가 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위에서 나왔던 ‘의미의 그물망’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선 종교의 역할을 재고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종교를 단순히 어떤 초인적·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종교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그 역할은 어떤 초월적인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에 초인적·초자연적 정당성을 부여해 인간의 규범과 가치를 정당화하는 것에 있다. 종교는 “이 세계는 창조주 또는 나름의 거대한 동작 원리가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이 세계에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창조주의 말씀 또는 세계가 동작하는 원리인 자연법에 따라 살아야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대부분 어떤 의미의 그물망 속에 사느냐에 따라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과 결정 그리고 행동을 한다.

(물론, 명확하게 윤리적 판단은 종교가 사실적 판단은 과학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는 없고 상호의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사고방식 자체도 당대의 의미의 그물망에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리 과학자가 과학이라는 학문에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해도 과학적 사고와 실험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며 과학자 자신의 연구 역시 정당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과거 서양 중세의 소작농인 내가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를 궁금해 하거나 인간의 움직임의 원리가 궁금해 인체를 해부해 보고 싶다고 해도 다음 날 끼니와 아픈 아이들 걱정 그리고 신이 만든 완벽한 세상에 궁금할 필요도 없다. 굳이 궁금하다면 교회에 가서 성직자에게 물어보면 되는 것이다. 오늘날도 상황은 비슷하다. 어떤 주제로 연구나 실험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투자를 받기로 하는데, 보통 국가나 기업이 투자자의 역할을 한다. 당연히 돈을 투자하는 이유는 국가가 지향하는 정책과 기조에 부합한 연구이거나 기업이 원하는 가치 창출을 위해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지원금이 나에게로 떨어질까? 당연히 국가나 기업에 입맛대로 보고서를 쓰고 발표를 해야 하며, 얼마나 더 돈이 될 수 있는지 국가 정책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피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과학자의 순수한 연구의 방향성도 의미의 그물망에 자유로울 수 없다.)

과학의 출현으로 윤리적 판단과 사실 판단을 모두 담당해 사회적 질서를 유지한 종교는 사실 판단의 자리만큼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대체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윤리적 판단은 어디 있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나 생각할 때, 성경을 들춰보지 않고 제단을 만들어 1000년 산 고목나무, 마을의 신성한 바위 그리고 산신령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과학은 사실만을 판별할 뿐 윤리적인 판단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 세계의 관리자가 없고 자연법칙도 확실하지 않고 또 어떤 것이 중요한지 가치체계조차 확실하지 않다면, 어떻게 세계를 바라봐야 할까?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것일까?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무질서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의 의미가 있고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우리는 질서를 지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나를 믿는다.” 이것이 근대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종교다.

이것을 인본주의라고 한다. 이 새로운 종교는 인류를 숭배하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에서 신의 역할을 맡고 불교와 도교에서 자연법이 설명했던 이 세계의 정체를 밝히도록 요구한다. 새로운 종교인 인본주의라고 불리는 의미의 그물망을 통해 인간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해야 했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권위가 필요하다. 신과 자연법은 그 자체로 권위를 가진다. 인간이 사는 세상을 만들고 세상의 일정한 법칙을 부여하거나 이 세상의 자연법칙을 설명한다. 한편, 인간은 그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은 불안정하고 불완전하다. 그럼에도 믿고 의지할 절대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삶과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이 된다. 하지만, 신도 아니고 자연법칙도 아닌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세계에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과거 많은 정치인·문학자·철학자들은 인간에게는 믿을만한 어떤 절대적인 권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어떻게 연대하고 무슨 이유로 남의 것을 빼앗지 말아야 하는가? 즉, 신과 절대적 법칙이 사라진 세상은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모든 것이 허용’된 지옥도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매일 죽음의 공포와 실존의 불안으로 공포에 떨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중세의 사고방식으로는 인간은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근대에는 적어도 개개인이 아닌 인류의 차원에서 과학과 돈 그리고 제국의 힘이 그 불안을 잠재웠다. 이것의 시작이었던 유럽 세계의 다방면적인 변화는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다는 희망, 자신의 사업을 키우기 위해 동행하는 상인들 그리고 미지의 세상에서 힘을 과시하고픈 군인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과학·돈·제국의 결합을 통해 현대에는 인류 역사상 볼 수 없었던(믿음은 해결하지 못했던) 가난·기아·전쟁을 획기적으로 줄여 인간의 힘을 보여줬다. 특히나 과학은 중세 이후의 권위의 원천이 되었다. 즉, 인간이 직접 발견하고 해석한 과학이라는 지식은 천문학, 물리학, 의학 등 여러 학문의 획기적인 발견과 발전을 통해 세계의 변화와 번영의 역할을 함으로써, 그 자체가 권위의 원천이 된것이다.

한편, 과학의 권위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실 판단만으로는 세계를 운용할 수 없다. 인간 사회는 가치판단이 없으면 존속할 수 없으므로 또 다른 윤리적 지식을 얻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바로, 경험과 감수성이다. 경험은 감각, 감정,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험에 주목하고 경험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받아들이는 것이 감수성이다. 감수성 없이는 어떤 것도 경험할 수 없고, 다양한 경험을 하지 않으면 감수성을 개발할 수 없다. 또한, 감수성은 실제로 사용해야 발달하는 실용적인 기술이다. 인본주의에서 감수성은 미적·윤리적 지식의 원천이 되는데, 이것이 발달하면서 아직 완비되지 않은 양심을 보완해 나가고 무지에서 계몽으로 가는 내적인 변화 과정이 된다. 이러한 인간 삶의 최고 경지는 하나의 느낌으로 모든것을 판단하는 것이다. 인본주의 최고의 가치는 인간의 내면에 있다.

과학은 저세상에서의 구원의 약속이 아닌 이 세상에 있는 여러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해 나가고  여러 질적인 변화를 보여주면서, 옛 종교는 더 이상 윤리적 가치를 대변하기에는 부족하게 되었다. 과학의 힘은 우리를 고정된 세상이 아닌 더 나은 세상, 더 진보된 세상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인간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주인공임을 보여주었다. 이 거대한 변화의 원동력은 인간 내면의 어떤 힘에 있다는 것. 즉, 우리는 인간의 감정, 욕망,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는 내면의 무엇인가가 우리 자신을 올바른 길로 이끌것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내면의 무엇인가는 이따금 침묵하기도 하고 너무나 시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내면의 무엇인가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찾을 필요 없이 좋은 것을 듣고 읽고 쓰고 표현해 보고 많은 것을 경험해 그 신호를 명확히 해 지혜라는 것으로 우려내야 한다. 이 표현하기도 어려운 복잡하고 미묘한 것, 어쩌면 잡아내려고 하면 빠져나가는 물처럼 되어있다. 이것은 어쩌면 공자의 표현대로 일이관지一以貫之의 경지일지도 모른다. 모든 중요한 가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 이미 우리에게 있다.

인본주의 종교 전쟁

인본주의는 인간의 내면 즉, 감정, 욕망, 경험이 의미와 권위의 원천이다. 여기서 불교나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와 같이 한 종교에 여러 분파가 있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인본주의도 자유 인본주의·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진화론적 인본주의로 분열되었다.

먼저 전통파는 인간을 정치, 경제, 예술, 국익, 종교적 교의 보다 개인의 자유의지에 더 큰 무게를 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해 저마다 각자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고 본인의 진면목을 표현한다. 이것을 통해 개인이 더 많은 자유를 누리면 누릴수록 세계는 더 아름답고 의미로 충만할 것이다. 이것을 자유 인본주의, 간단히 자유주의라고도 한다. 자유주의에 따르면 모든 답은 자신에게 있으니 스스로 생각해 보라고 한다. 그리고 좋게 느껴지면 느낌에 따라 행동하라고 한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고 정치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하며 경제는 고객이 항상 옳다고 주장한다. 한편,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가 사회적 신망과 정치적 힘을 얻으면서 부작용이 생겼다. 개인의 자유가 중시되면서 세상의 수많은 개인이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개인은 저마다 다른 것을 경험하며 서로 다른 욕망을 품는다. 이 과정에서 개인과 또 다른 개인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이 지점에서 자유주의는 민족주의와 은밀한 동맹을 맺었다. 일례로, 난민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우리는 개인의 자유는 없다. 다른 집단이 자신이 속한 집단에 위협을 가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인간 개인의 자유는 민족의 개념 속에서만 유효하다는 듯이 말한다. 이러한 모순은 자신의 나라의 독창성과 우월함을 강조하면서 정복 전쟁을 치르고 강제수용소를 짓게 했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자신의 자유와 자신의 나라의 독자성을 강조한 자유주의와는 다르게 타인들이 어떻게 느끼고 내 행동이 그들의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을 둘 것을 요구한다. 인간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세계평화나 사회화합은 꼭 필요한 것일 진데,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때 생기는 것이 아닌 외부의 필요와 경험을 우선 할 때 달성된다는 것이다. 내면의 성찰과 탐구를 통해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동정심을 기를 수 있어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반박은 통하지 않는다. 어차피 개인의 내면은 내가 처한 환경에 부지불식간에 잠식되어 있을 뿐이다. 내 정치적 견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취미와 야망은 내 진정한 자아라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내 성장 환경과 사회적 환경을 반영해 그것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의 계급과 자신이 사는 동네 그리고 학교에 따라 개인은 바뀌기 마련이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부자나 거지나 똑같이 세뇌 당한다. 부자는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는 환경에 처해 있고 거지는 자신의 흥미를 거세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있다.

개인이 내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자기반성을 하면 할수록, 진실에서 멀어질 뿐이다. 이것은 개인이 공과가 커지고 사회적 조건은 거의 따지지 않게 한다. 내가 부자라면 나의 공이 크기 때문이고 내가 거지라면 나의 과가 크기 때문이다. ‘진실’은 개인의 경험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현실 속에 존재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 속에 있는 것이다. 사회적 조건은 작게는 집단, 크게는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으로 해당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고 외쳤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자본주의 체제라는 공통된 사회적 조건에 예속되어 있기에, 비슷한 경험을 하고 똑같이 고통 받고 소외된다. 그래서 그들은 단결할 수 있는 것이다. 공통된 조건 속에서만 나 자신을 이해하고 공통의 이익을 추구할 때만 갈등을 줄일 수 있고 공통된 문제는 공동 행동을 통해서만 바꿀 수 있다. 개인은 없어지고 우리만 남기는 이러한 논리는 강력한 공동기구(사회주의 정당과 노조)의 출현을 일으켰다. 역사는 공동기구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라는 원칙을 준수하는 대신 당의 권력을 위해 존재 했다고 말하고 있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진화론에 근거하여 갈등을 최고로 평가한다. 갈등은 적자생존을 통해 진화를 촉진하는 인류 발전의 최고의 해법이다.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것은 자연법칙이다. 역시 인간이 양을 잡아먹는 것이 당연하다면 우월한 인간이 열등한 인간을 병탄倂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강한 백인이 약한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명민한 기업가가 운영하는 강한 기업이 둔한 기업가을 운영하는 약한 기업을 파산으로 내모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진화하지 못하면 도태되고 멸종한다. 이 역시 호모 사피엔스에게도 해당된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초인류로 거듭나야 한다. 하지만, 도대체 우월한 인간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특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은 새로운 지식, 진보한 기술, 아름다운 예술로 나타난다. 이것들이 모이면 번영한 사회로 나타난다. 우리는 누구도 거지나 범죄자, 정신병자의 경험이나 능력을 아인슈타인이나 베토벤의 그것과는 비교할 가치도 없다고 느낀다. 국가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더 진보하고 인류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나라는 그렇지 못한 나라보다 우월한 법이다. 나아가, 이 세상은 우월과 열등이 명확하기 때문에 진화를 위해서는 전쟁을 해야 한다. 전쟁은 자연선택의 가속하는 최적의 방식이다. 전쟁은 약자를 죽이고 강자에게는 보상을 내린다. 인생의 진실을 폭로하고 힘, 영광, 정복에 대한 야심 찬 의지를 일깨운다. 니체는 전쟁을 “인생의 학교”이며 “나를 죽이지 않은 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라고 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니체처럼 전쟁을 통해 인생의 진실을 깨우쳤다고 한다. 참호에서의 경험이 대학이나 정부 부처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쳐 주었고 독일 국민들은 그런 히틀러에게 표를 던졌다. 그렇게 무일푼에 교육도 받지 못한 외국인이 독일 총통이 되었다. 결국, 전쟁을 신성시하고 초인류를 꿈꿨던 히틀러는 세계 2차 대전에서 진화를 위해 수백만 명을 죽였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은 20세기를 이끌었다. 결국, 소련이 무너지면서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의 승자가 되었다. 시장과 민주주의가 수용소와 일당독재의 무자비함보다 훨씬 강했다. 그렇다고 온전히 전통적 자유주의가 승자가 되지는 못했다. 사회주의와 나치즘의 등장은 그때 당시, 자유주의의 논리가 자본가를 맹렬히 옹호한 덕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오죽했으면, “나에겐 굶어 죽을 자유가 있다.”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소련이 무너지고 나서의 자유민주주의는 20세기 초의 그것과는 달랐다. 대립했던 사회주의와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다양한 사상과 제도를 채택했다. 대표적으로 대중에게 교육, 건강,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좀 더 겸손해진 것이다.

인본주의의 위기

우리는 지금까지 의미의 그물망을 기준으로 간략한 역사를 알아보았다. 의미의 그물망은 언제든지 생성되고 갈라지고 버려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이 생성과 소멸의 역사는 4차 산업혁명을 위시한 과학·기술에 의해 다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종교와 기술은 상호작용하면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종교가 방향을 설정하면 과학·기술은 그 방향대로 발전한다. 그러나 방향은 주어졌지만, 이제는 멈출 수 없다. 이제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없어지고 개인 또한 없어진다는 예측이 있다. 유전공학은 인간의 생명, 감정 그리고 욕망을 낱낱이 파헤쳐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고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그것을 더 잘 이해하고 해석해서 자유의 가치를 위협할지도 모른다. 또한, 강화된 인간이 만들어져 강화되지 않은 인간보다 더 오래 살고 건강하며 인내심도 현명한 존재가 탄생해 상상의 전유물이었던 계급이 객관적인 증거로 명백해질지도 모른다. 결국 자유주의, 민주주의, 개인주의는 공산주의 이슬람교 나치즘과 같이 구시대에 유물 속으로 편입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자유주의, 개인주의, 인권 등의 의미의 그물망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과학과 기술은 이 그물망을 찢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과거, 자유주의가 산업혁명과 결합하였을 때, 새로운 기술이 쏟아져 내렸을 때, 수많은 사람이 도시의 프롤레타리아라는 새로운 계급으로 등장했을 때, 과거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경험, 필요, 희망은 그들에게 펼쳐진 현실을 자세히 분석하여 보여준 마르크스 그리고 레닌을 통해 명백해졌다.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산업사회의 여러 현상과 문제들을 설명하고 기술과 경제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든 것이다.

다시 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다. 믿음에서 관찰과 생각으로, 신에게서 인간으로, 성경에서 과학으로, 농경에서 산업으로, 겸허함에서 과시하는 것으로 그리고 농사에 한 평생 몸 바쳤던 사람이 프롤레타리아로 변화한 것처럼, 중세 상인과 귀족이 부르주아로 변화한 것처럼 새로운 계급과 환경은 종교와 기술에 의해 만들어지는 동시에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불음에 응답했다. 하지만 21세기 현재 과학·기술혁신이 기존의 종교를 위협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한편, 새로운 종교의 행방은 묘연하다. 이제 어떻게 과학·기술 혁신이 인본주의를 위협하는지 알아보자.

우리는 기본적으로 미래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예측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에 과학과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되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보다는 과학·기술이 현재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불러왔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것을 통해 위에서 보았듯이 과연 과학과 기술이 정말로 인본주의 가치 영역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고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나 미래에 최첨단 기술들 역시 인본주의 가치 영역에서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인본주의 세계관 하에서의 기술은 ‘과학이론을 실제에 적용하여 사물을 인간 생활에 유용하도록 가공하는 수단’이다. 덧붙인다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나아가, 인류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했던 인류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기아, 역병, 전쟁이다. 이 세 가지 문제로, 인간의 역사는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된다. 하루하루 먹고살던 사람들은 먹을 것이 사라지는 위협에 항상 노출되었고 어느 날 갑자기 이웃집 사람이 거품을 물고 쓰러져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죽기 시작해 하나둘씩 같은 신세가 되며 이웃 나라나 이웃 부족이 침략해 나의 자식과 재물을 죽이거나 약탈해간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죽음의 향기는 끊임없이 나의 코를 자극한다. 대대로 인류는 이 문제로 절대자에게 기도하고 여러 기발한 도구와 제도들을 발명했다. 하지만, 기아, 역병, 전쟁의 문제는 계속되었다.

통계적으로, 오늘날 기아, 역병, 전쟁의 문제는 과거만큼 심각한 문제가 아닌 듯하다. 또한, 우리는 이와 관련된 문제에 부딪혔을 때, 더 이상 신이나 불완전한 자연 현상을 원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조사와 반성을 통해 문제에 접근하는 사고방식을 취한다. 중요한 것은 자연스럽게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기아, 역병, 전쟁의 결과가 무엇인가? 바로 죽음이다. 인류는 죽음을 벗어나기 위해 싸웠다. 꽤 효과적으로 이것을 원인으로 하는 죽음에서 벗어났다. 그래도 죽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죽음은 공포이며 가장 고통스러운 결말이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죽음이라는 결말을 알고 있으며, 어쩌면 인생이라는 것은 죽음을 납득시키기 위한 여정일 것이다. 과거의 현인들은 죽음이 얼마나 인생을 소중하게 만드는지, 죽음은 사실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설파했다. 아무리 그래도 죽음은 그리 슬프면서도 달갑지 않다. 죽음은 인류의 공통된 문제이며 나아가 인본주의 자체에 어긋난다. 인간의 내면의 최선이고 우주적 존재라고 하는 인본주의는 치명적인 내재적 결함은 죽음이다. 아무리 능력이 있는 자도 죽는다. 능력은 인간이 최고의 존재라는 것이 외부로 드러난 증표이다. 인본주의가 인간을 아무리 최고의 자리로 올려놓으려 해도 죽음은 인본주의를 불편하게 한다. (물론, 죽음이 인간의 능력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과학의 발전은 이 불편함에 응답했다. 죽음은 더 이상 저승사자나 검은 로브를 입은 사신이 등장해 인간의 영혼을 데려가는 것이 아닌 심장이 멈추거나, 암세포의 등장 또는 혈관이 막히는 등 어떤 기술적 결함에 의한 것이다. 기술적 결함은 기술적 해결책이 있는 법이다. 인과관계에 지배되는 것이기 때문에, 원인만 제대로 진단하고 그 원인을 해결한다면, 결과는 성공적이다. 물론, 여전히 결함은 많고 죽음과의 전쟁은 요원하다. 그래도 죽음과의 전쟁은 인생을 걸만한 일이자 유망한 시장이다. 죽음은 인간을 안락하게 만들어주는 것을 넘어서 근본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새로운 발견과 새로운 시장을 위해 과학자들과 자본가들은 계속해서 죽음과의 사투에 나설 것이다.

죽음의 극복 다음은 바로 행복의 문제이다. 농업의 시대에서 산업의 시대로의 혁명은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기아·역병·전쟁에서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듯하다. 우리는 행복한가? 적어도 비극과 고통 속에서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인간은 그들의 행복보다는 국력 보강이라든지 국가에 봉사해야 할 도구로 다루어졌고, 국가는 개인을 위해서가 아닌 제도의 틀 안에서 그들을 다루기 위해 법을 제정하거나 교육과 복지를 시행했다. 하지만, 이제는 개개인의 행복이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행복을 인과관계의 측면에서 보자면, 행복은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할까?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은 필수적이지만, 무엇보다 주관적인 행복이 이 중요하다. 행복에는 심리적 행복과 생물학적인 행복이 있다. 우리는 심리적인 기대치에 부합하면, 행복함을 느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것은 끝없이 기대치는 높아진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행복과 고통은 신체감각에서 나온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좋은 친구를 만났을 때, 그리고 연인을 사귀었을 때 유쾌한 기분이 든다. 이 기분이 우리의 행복과 고통을 좌우하는 것이다. 외부의 자극으로 촉발된 내부의 자극이 행복과 고통이라는 감정을 만든다면, 내부를 자극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나 고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의 예로 마약을 복용하는 범죄자나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처방하는 항우울증 약, ADHD 약 등이며 심지어 아무런 하자가 없는 사람이 어떤 것에 집중할 수 있게 ADHD 약을 먹는다. 행복에 대한 문제 역시 인생의 목표이자 무한한 가능성의 시장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생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순간 지속되는 쾌락을 쫓고 있다. 그리고 이것에 부응하기 위해 더 편한 침대 매트릭스와 게임 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인본주의의 가치는 기아·역병·전쟁을 넘어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인 생명과 행복의 문제를 인류가 해결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로 여겨 과학·기술에 이 문제들을 해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불음에 응답해 선봉장으로 생물학과 컴퓨터 과학이 나섰다. 생물학의 인간에 대한 메커니즘을 해석하고 컴퓨터 과학은 그것을 기반으로 인간을 뛰어넘고 있다.

생물학은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다.’ 알고리즘이란 계산을 하고 문제를 풀고 결정을 내리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일군의 방법론적 단계들이다. 알고리즘 사용되는 예로, 요리 조리법이나 음료수 자판기 등이 있다. 조리법은 어떤 완성된 요리를 만들기 위한 절차이다. 이 절차에 따라 행동하면, 만들고자 하는 요리를 완성할 수 있다. 음료수 자판기는 음료수를 판매하기 위한 기계장치로 우리가 원하는 음료수를 먹고 싶다면 그 값을 지불하는 절차와 일정한 버튼을 누름으로써 자판기는 우리에게 음료수를 준다. 유기체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동물은 감각과 감정을 통해 결정과 행동을 한다. 이 감각과 감정은 유전자에서 나온다. 유전자는 생존을 원한다. 그래서 자신을 최대한 다음 세대로 전달하려고 한다. 과거 양육강식의 자연에서 생존과 번식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아직까지 유전자에 영향을 받고있는 우리는 생존과 번식이 인생의 최고 의제이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감각 그리고 욕망은 생존과 번식에 유용한 무엇인가를 스스로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주 빠르고 복잡하게 계산해 낸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느낌, 어떤 충동, 어떤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또한, 유전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또는 갖게 될 어떤 특성들의 정보들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전달되며 사라진다. 생물학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유전자로 보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믿고 있는 믿음 인간의 행동과 결정의 원천인 ‘영혼’이라든지 ‘불멸의 개인’ 그리고 ‘진정한 자아’와 같은 특성들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위에서 보았듯이 진화론은 성경의 권위에 대해, 진위 여부를 검토함으로써 그 권위에 의문을 던지는 것, 뿐만 아니라 인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진정한 자아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진다. “인간의 본질은 과학적으로 유전자 속에 있다. 그런데, 이것은 사라지기도 변화하기도 한다. 그 증거는 인간을 최고의 지위로 올려 논 과학적 방법론 속에 있다.”

영혼이 없다는 말은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로 이어진다. 우리가 진정 자유롭다면 자유의지가 있다면, 자연선택은 없었을 것이다. 자유가 끼어들 여지없이 유기체가 하는 모든 선택은 유전암호를 따른다. 하지만, 우리는 유전자의 명령이 아닌 어떤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고 느낀다. 그렇다. 욕망이 자유라고 한다면 분명 그렇다. 문제는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특정 욕망을 선택’ 할 수 있느냐이다. 우리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 때, 이것이 내 지시나 허가 없이 갑자기 나타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을 통해, 생각, 감정과 욕망이 어떤 의식의 흐름의 연속이라면 약물, 유전공학, 직접적인 뇌 자극을 통해 욕망을 조작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영혼과 자유의지가 없다면 도대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영혼은 종교적 개념인 듯하다. 그리고 자유의지는 충분히 없다는 것이 이해된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피투성被投性을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자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분리할 수도 불리 될 수도 없고 단일한 본질을 지닌다. 이것은 내적인 껍데기 속에 깊숙이 숨어있는데, 이것이 진정한 ‘나’이다. 자아를 발견한 나는 진정 자유롭고 행복하다. 자아를 통해 인간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아는 진정한 개인이 된다. 왜냐하면, 자아는 내면에 있고 이것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이고 이것을 발견해 자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도 오직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아를 통해 개인은 절대적인 권한을 갖는다. 이 권한을 통해 우리는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고 수많은 기업과 시장이 고객이 원하는 것들을 만들고 판매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상대적 아름다움이나 개인의 선택이 이토록 존중받는 시대는 없었다.

하지만, 생물학에서는 자아의 존재 역시 부정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러한 질문을 할 때는 보통은 일상에서의 시끄러운 잡음을 내는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나에 대한 진심 어린 이야기나 조언을 하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하지만 여러 실험을 통해 서로 다른 자아가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바로 ‘이야기하는 자아’와 ‘경험하는 자아’이다. 분할뇌 연구에 따르면 논리적 추론과 말하기는 좌뇌가 담당하고 예술작품 감상이나 운동과 같은 직관적 영역은 우뇌가 담당한다고 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자아’는 좌뇌와 비슷하고 ‘경험하는 자아’는 우뇌와 비슷하다. 경험하는 자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오직 경험한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이 경험을 통해 미래에 관한 결정과 자신이 살아 온 환경에 의미 부여하느라 바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경험했던 모든 것들은 경험하는 자아가 한 것이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야기하는 자아이기 때문에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왜곡이 생긴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경험하는 자아가 겪은 경험을 모두 다루지는 않고 경험의 ‘정점’과 ‘결말’만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한다. 즉, 경험하는 자아가 경험을 하고 이야기하는 자아는 그 경험에 정점과 결과의 평균을 내어 의미와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다시 경험 속에 녹아들어 좋은 경험을 만들지, 나쁜 경험을 만들지에 영향을 미친다. (라마단 기간과 같은 의미 있는 금식 같은 것이 그 예이다) 물론, 그렇다고 경험하는 자아가 이야기하는 자아에 속수무책 당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야기하는 자아가 세운 완벽한 계획을 경험하는 자아가 수없이 무너뜨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이어트, 금연과 같은 새해 목표) 이야기하는 자아의 독단을 경험하는 자아가 쉽게 허락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경험과 이야기의 주체가 다르다면, 다시 물어보겠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나’란 바로 이야기하는 자아이다. 이 질문은 수십 년 축적된 수많은 경험이 아니라 나에 대한 논리적으로 정돈된 ‘이야기’에 대한 답이다. 즉, 인생이라는 경험의 무질서를 논리적으로 일관된 이야기로 정제해서 내놓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아의 독단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 독단은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일관되고 변하지 않는 느낌을 만들고 우리는 그것을 ‘자아’라고 명명한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는 축약되거나 왜곡된 경험인 것이다.

인간을 숭배하는 의미의 그물망의 해체 그 다음은?

생물학에 따르면 영혼, 자유의지, 자아는 허구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이 아니다. 자유주의 국가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와 같은 주장을 대부분 무시한다. 『진화론』이 등장했다고 기독교 세계관이 무너진 것이 아니듯이 아마 인간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치·경제·사회에서는 아직 자유주의를 존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주의는 이야기하는 자아를 신성시한다. 이야기하는 자아를 통해 개인은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고 동시에 외부의 시스템에 의해 강화된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자아는 이제는 ‘나’를 더 잘 알지 못한다. 이제 나를 더 잘 아는 것은 외부 알고리즘이 될 것이다. 외부 알고리즘은 나의 선택과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외부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선택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 될 것이다. 이제는 왜곡된 이야기하는 자아에 의지하지 말고 더 정확한 시스템에 나를 맡겨야 할 것이다.

또한, 정치적·경제적으로도 인간은 소외당할 것이다. 과거 인간의 경제적·정치적 권한을 쟁취하고 권력자들이 그것을 넘겨준 이유는 스스로가 경제적 가치와 군사적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 국가가 독재국가보다 더 나은 경제활동과 전쟁에서의 효율성을 보여줬으며 공장과 전쟁터에서도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다가오는 미래에는 더 이상 대량 징집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보다 더 나은 기계들이 전쟁터를 누빌 것이다. 또한 과거 이동 수단으로 말이 자동차로 대체된 것처럼 인간의 지적인 면을 대체하는 수많은 기술이 인간의 노동력 또한 대체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권한과 자유를 실질적으로 박탈한다는 것이다. 정치·경제·사회는 더 이상 개인을 중요시하지 않고 유권자, 고객, 보는 사람의 눈을 외부 알고리즘이 대체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유기체는 알고리즘이고 내부의 알고리즘은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 정확한 외부 알고리즘이 그것을 대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라는 통찰을 이어받은 컴퓨터 과학은 유기물과 무기물 사이의 벽을 허물고 개인의 권한을 네트워크로 연결된 알고리즘으로 이동 시킬 것이다. 많은 사람이 각자의 개별성을 지키고자 집단의 횡포에 맞서 싸우고 있지만, 우리가 구가하고 있는 최첨단의 시스템과 기술들이 개별성을 파괴하는 진정한 적인지는 모르고 있다. 또한, 가장 중요한 변화는 개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 개인의 경제적·군사적 쓸모가 사라진다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명확한 엘리트주의를 만들 수 있다. 과거의 엘리트들은 그 권한이 결국 허구였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의 알고리즘이 ‘강화’된다면 어떻게 될까? 더 좋은 알고리즘은 더 나쁜 알고리즘 보다 우리의 환상이 아닌 실제 세계로 내려온 사회·경제적인 힘으로 그 차이를 명백하게 할 수 있다. 기아, 전쟁, 역병의 극복은 대중을 위한 인류의 포부였다. 하지만, 불멸, 행복 그리고 강화된 인간은 대중을 위한 기술이 아닐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대중이 아닌 강화된 소수만 있어도 힘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소수의 엘리트들이 어떤 과학과 기술을 선보이느냐가 그 나라나 민족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고, 대다수의 민중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 될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기술은 우리 생활 영역 곳곳에 침투해 우리를 더 잘 알아가고 있다. 또한, 어떤 알고리즘(딥 러닝)은 인간을 한계를 뛰어넘어 어떤 문제에 대해 예측력을 극대화해 ‘전역적인 오류의 최소화’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블록체인은 우리가 믿고 있었던 국가와 기업들의 신뢰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지능과 의식이 분리되고 인간보다 지능이 뛰어난 알고리즘이 등장하고 있다. 『호모 데우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기술 혁명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리고 그 기술이 어떻게 우리 삶을 변화시킬지도 보여준다. 그는 역사학자이지만, 기술의 힘을 읽어낼 수 있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통찰력 있게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혁명이라고 불리는 특정 시대는 기존의 믿음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믿음이 등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질문을 하면서 글을 끝마친다.

1. 유기체는 단지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처리 과정인가?

2. 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사회, 정치, 일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1]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김영사,2017)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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